그녀의 시크릿 투자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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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화 _ 좋은 날, 새빨간 와인을 닮은 그녀의 향기

그녀의 시크릿 투자비법을 무심코 엿보게 된 이과장은 그녀를 오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대화를 통해 그의 오해와 경계심을 풀어주고,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렇게 다시 만난 그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장소에서, 알 수 없는 행동을 이어간다.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일어났다. 베게 옆에 놓인 핸드폰은 이미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큰일이다. 회사에 늦었다. 어제 배달 콜이 많이 들어와서 새벽까지 자전거를 타면서 배달을 하다 보니, 너무 피곤해서 핸드폰 알림을 나도 모르게 껐나 보다. 급히 양치를 하면서 머리에 대충 물을 묻히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을 걸쳐 입었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꼬여있는 사원증을 챙겨 대문을 나섰다.
택시를 타고 싶지만 택시를 타면 어제 배달해서 번 돈을 모두 쓰게 되는 꼴이라 늦어도 지하철을 타야 했다. 그렇게 헐레벌떡 뛰면서 핸드폰을 보니 토요일이다. 제길. 어제 배달이 많았던 이유는 금요일 밤이어서 그랬나 보다. 그 순간 지각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렇게 한심하게 살고 있는 내 자신이 초라하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문을 열었다. 눅눅하고 꼬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지만 다시 침대에 누워서 눅눅한 이불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헝클어진 머리에서 나온 기름기와 침으로 얼룩덜룩한 베개와 이불이지만 이 곳은 나를 유일하게 감싸주는 따뜻하고 편한 나만의 공간이다.
옆으로 돌아 누워 쇼츠를 넘기며 보다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점심도 역시 라면으로 때울 예정이지만 그래도 설레였다. 왜냐면 오후에 안주임과의 첫 데이트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만난 그녀의 직접 배달한 치킨을 같이 먹게 된 그날, 우리는 다음 주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녀가 정해준 데이트 일정은 오후 4시, 장소는 한티역에 있는 롯데백화점 1층이었다. 도대체 그 시간에 백화점에서 어떤 데이트를 하자는 것인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보통의 데이트라면 같이 밥을 먹거나 카페를 갈텐데 첫 만남에 백화점이라니. 게다가 한티역 주변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비싼 아파트와 학군이 좋은 지역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약속 장소도, 시간도 너무도 애매해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한티역은 롯데백화점과 연결되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두리번거리자 1층 향수 매장에서 향수를 고르고 있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과장님 잘 찾아왔네요? 매일 배달한다고 오토바이만 타고 다니셔서 지하철 타는 법 잊어버리신 줄 알았어요. 호호호"
“......”
안주임의 첫마디는 개그와 비아냥거림의 선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말처럼 기분이 묘했다. 그때 백화점 1층에 퍼져있는 화장품과 향수 냄새가 내 코를 스쳤다. 그 순간 묘했던 내 마음은 작은 스푼으로 입 속에 떠 넣은 차가운 샤베트처럼 달콤하게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향 정말 좋다. 향수 사러 온 거야?"
"아. 선물할 것 찾고 있다가 시향 해봤어요. 어때요 좋죠?"
그녀는 향기 나는 손목을 들어 내 코에 가까이 가져왔다. 난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향기가 내 코에 닿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면서 마음이 황홀해졌다. 내 방에서 나는 시큼한 아저씨 냄새와는 달랐다. 너무 달랐다. 이것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분명한 여자의 향기였다. 내 심장은 그녀의 방에 처음 들어갔던 그날처럼 또 다시 매우 심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향수가게를 나와서 위층에 올라가서는 요가복을 구경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타이트한 요가복을 보며, 난 그녀 뒤에서 나도 모르게 그녀가 요가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안주임은 고수였다. 사람의 마음을 마치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본능적으로 흔들 줄 아는 고수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난 경험이 있지만…… 하지만 그녀는 아직 어리고 예쁘다고......'
난 주먹으로 머리를 내려치면서, 갑자기 불끈불끈 타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기 바빴다. 그러면서도 밖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나 역시 이 상황에 익숙한 척, 그녀를 따라다녔다. 이번에도 안주임은 구경만 하더니 지하 식품관으로 내려갔다.
성인 남녀가 데이트를 하면서 식품관을 둘러보는 것은 많은 상상을 하게 했다. 그녀의 집, 그리고 음식이 차려진 우아한 식탁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모습. 그 사이 이혼한 전처의 얼굴이 오버랩 돼서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나 역시 과거에 그런 낭만에 빠져서 결혼을 했었다. 안주임이 이 거짓된 허상으로 써내려가는 멜로 소설에서 어서 빠져 나와야 했다.
혼란스러워 하는 내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안주임은 와인 매장으로 가더니 선뜻 와인을 한 병 골랐다. 백화점 와인은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가성비 좋은 와인들이 많았고, 전문 셀러의 설명까지 들으니 오랜만에 부자 대접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래 백화점은 이 맛이지!’ 그 동안 인터넷 쇼핑과 동네 편의점에 빠져서 백화점이 주는 이 부(副)의 아름다운 향기를 잊고 있었다.
"이 와인, 선물할건데 포장해 주시겠어요?"
안주임의 와인 선물을 받는 사람은 누굴까 무척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의 집에 치킨을 배달하고, 서로 친해져서 같이 여기까지 오긴 했다만 말끝마다 톡톡 쏘는 그녀의 말에 소심한 내가 또 상처를 받을 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음화 예고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그녀의 뒷 모습을 보며 잊고 지냈던 여자의 향기를 느끼게 된 이과장, 그녀의 비밀을 조금씩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작가 소개

조훈희 순수문학 등단작가 겸 부동산학박사. 부동산과 컨텐츠를 결합한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현) 한양대학교 부동산융합대학원 겸임교수, 부동산 투자 및 개발회사 대표 '부동산 투자, 농사짓듯 하라', '밥벌이의 이로움' 등 저자 전) 현대캐피탈, 코람코자산운용, CBRE Korea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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